세월이 우리를 갈라놓는다 할지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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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한솔과 처음 만난 날을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좁은 책방에 북적북적 모인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통성명을 나누고 목적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은 날이었다. 하얀 얼굴에 웃을 때면 눈이 크게 휘어지는 한솔과 우연히 대화를 시작했다. 한솔은 "저 진짜 시집 거의 안 읽거든요." 하면서 곧 출판사 인문교양팀의 편집자가 된다고 했다. 맥주를 마시고 있으면서도 "나 맥주 마시고 싶어!"를 열 번쯤 외치고 단 한순간도 손에서 맥주캔을 놓지 않았다. '웃기는 분이시고 술 좋아하시는구나...' 한솔의 첫인상은 그렇게 남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솔은 책은 거의 읽지 않고 맥주를 많이 마시는 편집자가 되어 출근을 시작했다. 한솔과 나눈 몇 번의 대화에서 은은하고 조용하게 돌아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얘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번호를 땄다. 우리는 책방에서 손님 8과 손님 9 정도의 위치에서 만났는데, 나는 책방에 갈 때마다 한솔이 있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한솔은 있음과 없음 사이의 갭이 큰 사람이었다. 한솔이 있으면 그 자리에는 묘한 위트가 더해졌다. 마치 샐러드 위에 후추를 뿌리듯이. 한솔이 없다고 샐러드를 만들 수 없는 건 아니지만, 한솔이 있을 때 맛이 완성됐다. |
내가 특히 좋아하는 한솔의 이상한 짓으로는, 한솔과 친구들이 가지는 낮술낭독회를 꼽을 수 있다. 맥주를 마시고 있어도 맥주가 마시고 싶은 한솔답게, 한솔의 친구들은 약간 술에 돌아있는 듯하고, 또 출판사 관계자들 답게 인생이 책에 절여져 있어서, 이 조합으로 완성된 것이 낮술낭독회라 하겠다. 그 모임은 시작부터 질펀함을 전제로 하기에 꼭 누군가의 집에서 모이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모임의 첫 번째 목적은 당연히 죽치고 앉아 술을 진탕 마시는 것이다. 뭐 이런 풍경이야 흔하다. 세상에 날고 긴다는 술꾼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모임을 여타의 술꾼과 구별 짓는 점은 두 번째 목적이다. 이들은 술을 마시면서 그러니까... 낭독을 한다. 낭독도 그냥 낭독이 아니다. 이들은 낭독하기에는 어딘가 수치스러운 책을 골라 일부러 낭독하며, 질펀한 술판에 변태성까지 가미했다. 박찬욱 감독의 얼굴이 부담스럽게 클로즈업되어 있는 <박찬욱의 오마주> 같은 책이 그 자리의 안주가 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왜 그런 책들 있지 않은가. 사회적 체면상 공공장소에서 읽을 수는 없지만, 읽는 이의 취향에 따라 재미만은 확실히 보장해 주는... 숨읽명 나만의 길티플레져... 낮부터 집에 모여 와인을 퍼마시는 것도 수상한데, 그 자리의 안주가 낭독 수치 게임이라니. 한솔의 얘기를 듣다 보면 역시 이상한 인간 중의 최고봉은 책 만드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드는 것이었다. |
내 안의 한솔은 긍정적이지도 밝지도 않은, 어느 쪽이냐 하면 냉소적인 편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자신과 세상을 동시에 비틀며 농담을 만들어낼 때면 도무지 그 재미의 폭풍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농담을 맞받아칠 의지도 발휘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 바닥을 뒹굴고 집에 돌아와서도 사흘밤낮을 곱씹는다. (읽는 여러분도 바닥을 뒹굴 수 있도록 한솔의 농담을 뭐라도 하나 옮겨 적어보려고 했는데, 본디 농담이라는 것은 당시의 온도습도조도와 딱 맞아떨어졌을 때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며, 그 모든 온습도를 묘사할 기술이 내게 없어 포기하기로 했다.) 그렇게 8년 전 확신의 번따를 했던 한솔이 밖에서 만나던 친구에서 집에서 만나는 친구가 되고, 당시 한솔의 남자친구였던 분이 남편이 되는 것을 보고, 한솔의 신혼집에서 고양이와 인사를 나누고, 오랜만에 만난 한솔과 포옹을 하려는데 만삭으로 부풀어 오른 한솔의 배가 내 배에 먼저 닿고, 첫 번째 아가의 6개월을 축하하고, 어린이 집에 다니기 시작한 아가의 하원을 함께 하며 우리의 시간이 쌓였다. |
얼마 전에는 멍하니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문득 아이를 낳은 친구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느슨해졌는지를 떠올렸다.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 예전에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만나면 되지 왜? 상황이 바뀌었으면 바뀐 상황에 맞춰 노력을 기울이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새 나는 출산 이후의 친구들과 연락이 뜸해져 있다. 아이 한 명까지는 친구의 집에 내가 찾아가는 노력으로 만남이 이어지지만, 두 명부터는 내가 찾아가는 것조차 친구에게 부담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는 매일 자라나고, 아이는 매일 변화하고, 아이는 어떤 확답도 부모에게 허락해 주지 않는다. 우리는 늘 상황을 보게 되었고, 친구가 매번 거절의 말을 꺼내게 만드는 건 미안함에 미안함이 더해지는 일이라, 나는 점점 미안해질 일을 만들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나 역시 체력이 없어 조금만 무리를 해도 몸이 성을 내는 통에, 친구를 만나러 먼 길을 다녀올 엄두도 잘 내지 못한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했던 세상의 말을 하나 더 이해했다. 이렇게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거구나. 나는 다를 거라던 마음이 꺾여 조금 분했던 날, 마침 한솔이 어린이날 일기를 올렸다. "엊그제부터 한솔 생각이 나서 한솔 얘기를 했답니다. 두 어린이와 맞이한 어린이날을 축하해요. 늘 사랑을 보냅니다." "나도 잎새 생각을 합니다... 고마워요 늘 사랑." 멀리 있는 친구와 사랑이라는 단어를 주고받는 것으로 작은 위안을 삼았다. |
그리고 어제, 밤늦게 집에 돌아왔더니 네모난 소포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한솔이 보낸 소포였다. 칼로 조심히 소포를 열자 맨 위에 엽서 한 장이 놓여있다. 소포 겉면에 적힌 한솔의 이름에 이미 마음이 뭉클했는데, 빼곡한 손글씨를 읽고 있으려니 한솔을 한 조각 떼어 받은 기분이 들었다. 한솔의 엽서에는 최근 읽고 재밌었던 책과 나를 생각나게 했던 책을 함께 보낸다고 쓰여있었다. 엽서 밑에 깔려있던 완충재를 걷어내자 제일 먼저 김부각이 보인다. 한국인이 소포에 김부각을 넣는 것은 소포의 장르와 상관없이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고 싶었다는 뜻이다. 김에 찹쌀가루를 묻혀 튀겼는데 그걸 싫어할 사람은 없으니 확신의 호감을 쟁취하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마음이 사랑의 다른 언어라는 걸 안다. 김부각 아래에는 한솔이 고른 책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나의 손이 내게 말했다 - 페미사냥 - 너와 세상 사이의 싸움에서 - 동물생각 - 셰익스피어 글방 - 쓰게 될 것 - 봄이야기 - 이름을 알고 싶어. 책들은 빨갛고 파랗고 노랗고 초록했다. 한 권 한 권 꺼낼 때마다 명치께가 우르르 뜨거워졌다. 책의 나열이 그 자체로 시 같았다. 쓰게 될 것. 한솔이 건네는 다정한 예언. 명료한 지시. |
아직 한솔의 두 번째 아가를 만나보지 못했다. 아가는 따뜻한 살로 만들어진 작은 포대자루 같은데, 어제 처음 '잡고 서기'를 해냈다고 했다. 우뚝 선 포대자루 아기. 한솔은 엽서에서 아가들은 크고 그만큼 나는 낡았다고 적었다. 아가가 큰 만큼 나도 새로워진 면이 있겠죠, 라고도 적었다. 한솔이 낡은 만큼 나도 낡았다. 생명 덩어리인 아이들이 자라나는 동안 낡고 스러진 우리는 어디에 닿을 수 있을까. 우리가 충분히 낡을 만큼 시간을 넉넉히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뽀얀 아가를 자박자박 키워낸 친구들이 늙고 작아져 괴팍한 할머니가 되는 걸 보고 싶다. 아가가 있는 삶과 아가가 없는 삶의 갈래길을 걷는 우리가 폭싹 늙어서도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았으면 좋겠다. 이상한 친구가 만들어내는 달고 짠 세계에서 오래오래 정신 못 차리고 싶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