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낭독낮술클럽 intro

by ipsae






빨, 빨, 빨간 맛

오늘은 스레드에서 이런 문장과 마주쳤다. ‘40세. 사람 보는 안목이 생기는 게 아니라 사람을 안 본다.’ 덧글에는 내 말이 그 말이라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안목도 기력도 없다는 한탄 사이로 43세도 등장했다. ‘43세. 가는 사람 안 붙잡고 오는 사람 경계한다.’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방법은 인간을 없애는 거라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공감의 말을 남기며 와글거렸다.







영포티도 되지 못한 포티의 삶은 인간과의 교류를 단절하며 시작된다. 어느 날은 친구에게 회사에서 동료와 소통하는 게 힘들다고 토로했는데, 친구는 자신의 온몸에 빨간 차압딱지를 붙이고 싶다고 했다. 자기가 동료를 직접 피하는 것도 힘이 드는 일이어서, 멀리서 빨간 차압딱지를 보고 알아서 피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어유 험하다, 얘.” 하고 피해 가길 바라는 마음은 뭘까. 우리라고 처음부터 이런 사람인 건 아니었는데. 포티가 뭐길래 이 모든 비능동적 마음을 불러오는지 의문이다.







사람도 만나지 않고 나가 놀지도 않으면 시간이 남아돌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캘린더는 언제나 꽉 차있고, 나는 매일 해야 할 일에 시달린다. 왜 이렇게 시간이 없나 들여다봤더니, 중년의 삶이란 하루에 한 가지 활동 밖에 소화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퇴근하고 저녁에 빨래를 하면 그날은 빨래하는 날이다. 요가에 가면, 그날은 요가하는 날. 집에서 밥을 해 먹으면, 그날은 요리하고 넷플릭스를 보는 날이다. 일찍 자는 날에는 일찍 자는 것만 있고, 핸드폰을 보는 날은 핸드폰 보는 것만 있다. 하루에 한 개의 할 일과 한 개의 놂만을 번갈아 해치우다 보니, 아무 약속 없이도 한 달 내내 바쁨은 이어진다. 놀 수 있을 때 놀아두라는 선조들의 조언이 이런 거였나. 뒤늦은 외마디를 질러보지만, 놀아둘 수 있던 시기는 갔고 지치고 늙은 포티만이 남았다.







적극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에 차압딱지가 붙으면서, 이것이 말로만 듣던 중년의 위기인지 주변 포티들과 함께 토론을 벌이고 있다. 사람을 만날 에너지는 없지만, ‘사는 게 재미없다’는 말만큼은 열과 성을 다해 쏟아낼 수 있다. 회사라는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너무 커진 탓에 더 이상 이상향을 꿈꿀 수 없고, 시든 육신을 데리고 사는 비용이 커져 충동적 퇴사를 할 수도 없으며, 이직을 한 곳에서 새로운 악에 적응하느니 지금 있는 곳에서 익숙한 악을 피하며 살기를 선택할 때 중년의 위기는 온다. 좋은 것을 보아도 앗차 하는 사이에 감동이 사라지고, 한 톨의 무례함도 견딜 수 없어서 물리적 손절과 심정적 거리두기를 거듭할 때 중년의 위기는 온다. 몸에 난 털이 하나 둘 하얗게 세고, 익숙한 삶의 행보를 답보하다가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불현듯 주말 알바를 시작할 때, 대출을 받을 때, 연예인과 사랑에 빠질 때 중년의 위기는 온다.







어제는 엄마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다. 밀린 효도를 해치우는 마음으로 엄마의 밀린 수다를 한참 들어주다가, 작년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런 게 삼재인가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엄마는 육십이 되면 사는 게 조금 수월해진다고 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되물었다.


“정말? 지금이 더 쉬운 거 같아? 그러면 그게 내 유일한 희망이야.”


“그럼, 삼십 대 사십 대에 비하면 훨씬 수월하지. 오십 되면 좀 나아지고, 육십은 내 전성기 같아. 그런데 지금 수월하려면 너 나이 때 나답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야. 그래야 수월해지는 거야.”


엄마는 희망인 듯 희망 아닌 말을 했다. 중년의 위기로 정의 내려지는 시기를 거치면 다음엔 어떤 슬로건과 함께 살아가게 될까. 뽀얗게 피어오르던 한 시절은 눈앞에서 찬란하게 저물었고, 이제 나는 컴컴한 동굴 속 축축한 벽을 더듬으며 다음 시절로 간다. 가슴엔 빨간색 차압 딱지가 붙어있다. 멀리서 바람이 불어온다.







빨, 빨, 빨간 맛

오늘은 스레드에서 이런 문장과 마주쳤다. ‘40세. 사람 보는 안목이 생기는 게 아니라 사람을 안 본다.’ 덧글에는 내 말이 그 말이라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안목도 기력도 없다는 한탄 사이로 43세도 등장했다. ‘43세. 가는 사람 안 붙잡고 오는 사람 경계한다.’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방법은 인간을 없애는 거라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공감의 말을 남기며 와글거렸다.

빨, 빨, 빨간 맛

오늘은 스레드에서 이런 문장과 마주쳤다. ‘40세. 사람 보는 안목이 생기는 게 아니라 사람을 안 본다.’ 덧글에는 내 말이 그 말이라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안목도 기력도 없다는 한탄 사이로 43세도 등장했다. ‘43세. 가는 사람 안 붙잡고 오는 사람 경계한다.’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방법은 인간을 없애는 거라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공감의 말을 남기며 와글거렸다.

영포티도 되지 못한 포티의 삶은 인간과의 교류를 단절하며 시작된다. 어느 날은 친구에게 회사에서 동료와 소통하는 게 힘들다고 토로했는데, 친구는 자신의 온몸에 빨간 차압딱지를 붙이고 싶다고 했다. 자기가 동료를 직접 피하는 것도 힘이 드는 일이어서, 멀리서 빨간 차압딱지를 보고 알아서 피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어유 험하다, 얘.” 하고 피해 가길 바라는 마음은 뭘까. 우리라고 처음부터 이런 사람인 건 아니었는데. 포티가 뭐길래 이 모든 비능동적 마음을 불러오는지 의문이다.

사람도 만나지 않고 나가 놀지도 않으면 시간이 남아돌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캘린더는 언제나 꽉 차있고, 나는 매일 해야 할 일에 시달린다. 왜 이렇게 시간이 없나 들여다봤더니, 중년의 삶이란 하루에 한 가지 활동 밖에 소화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퇴근하고 저녁에 빨래를 하면 그날은 빨래하는 날이다. 요가에 가면, 그날은 요가하는 날. 집에서 밥을 해 먹으면, 그날은 요리하고 넷플릭스를 보는 날이다. 일찍 자는 날에는 일찍 자는 것만 있고, 핸드폰을 보는 날은 핸드폰 보는 것만 있다. 하루에 한 개의 할 일과 한 개의 놂만을 번갈아 해치우다 보니, 아무 약속 없이도 한 달 내내 바쁨은 이어진다. 놀 수 있을 때 놀아두라는 선조들의 조언이 이런 거였나. 뒤늦은 외마디를 질러보지만, 놀아둘 수 있던 시기는 갔고 지치고 늙은 포티만이 남았다.

적극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에 차압딱지가 붙으면서, 이것이 말로만 듣던 중년의 위기인지 주변 포티들과 함께 토론을 벌이고 있다. 사람을 만날 에너지는 없지만, ‘사는 게 재미없다’는 말만큼은 열과 성을 다해 쏟아낼 수 있다. 회사라는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너무 커진 탓에 더 이상 이상향을 꿈꿀 수 없고, 시든 육신을 데리고 사는 비용이 커져 충동적 퇴사를 할 수도 없으며, 이직을 한 곳에서 새로운 악에 적응하느니 지금 있는 곳에서 익숙한 악을 피하며 살기를 선택할 때 중년의 위기는 온다. 좋은 것을 보아도 앗차 하는 사이에 감동이 사라지고, 한 톨의 무례함도 견딜 수 없어서 물리적 손절과 심정적 거리두기를 거듭할 때 중년의 위기는 온다. 몸에 난 털이 하나 둘 하얗게 세고, 익숙한 삶의 행보를 답보하다가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불현듯 주말 알바를 시작할 때, 대출을 받을 때, 연예인과 사랑에 빠질 때 중년의 위기는 온다.

어제는 엄마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다. 밀린 효도를 해치우는 마음으로 엄마의 밀린 수다를 한참 들어주다가, 작년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런 게 삼재인가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엄마는 육십이 되면 사는 게 조금 수월해진다고 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되물었다.


“정말? 지금이 더 쉬운 거 같아? 그러면 그게 내 유일한 희망이야.”


“그럼, 삼십 대 사십 대에 비하면 훨씬 수월하지. 오십 되면 좀 나아지고, 육십은 내 전성기 같아. 그런데 지금 수월하려면 너 나이 때 나답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야. 그래야 수월해지는 거야.”


엄마는 희망인 듯 희망 아닌 말을 했다. 중년의 위기로 정의 내려지는 시기를 거치면 다음엔 어떤 슬로건과 함께 살아가게 될까. 뽀얗게 피어오르던 한 시절은 눈앞에서 찬란하게 저물었고, 이제 나는 컴컴한 동굴 속 축축한 벽을 더듬으며 다음 시절로 간다. 가슴엔 빨간색 차압 딱지가 붙어있다. 멀리서 바람이 불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