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커피

25년 2월 1일 토요일

눈밭에 찍힌 강아지 발자국을 목격하며 럭키하게 2월을 시작.

25년 2월 2일 일요일

헙 사장님이 보고 싶어서 딸기를 사들고 두 달만에 에 갔다. 그 사이 음료 꿈나무가 된 사장님이 20분에 1번씩 음료를 내주셨다. 첫 잔은 민트를 띄운 드립커피.

요청하지 않은 다음 잔은 시나몬 스틱을 꽂은 두유라떼. 질 좋은 시나몬 스틱이 아까워서 받자마자 빼고 재활용 하실 것을 권했다.(손님용 말고 사장님용으로)

인사만 하고 돌아올 예정이었던 방문은 사장님의 어머니와 마주치며 종잡을 수 없는 행방으로 이어졌다. 어머니와 마주 앉아 3번째 음료인 말차라떼, 페퍼민트 가루를 뿌린 계란 후라이, 따뜻하게 데운 파니니 1/3조각을 나눠 먹었다. 6시간의 길고 깊은 대화 끝에 초췌해진 세 사람이 책방 문을 닫고 나섰다.

메모장에 빼곡히 적은 그 날의 대화를 종종 꺼내봤다.

25년 2월 4일 화요일

직장인의 아침 커피는 싸고 양이 많은 테이크아웃이다. 여러 프랜차이즈를 거친 끝에 바나프레소로 정착해 있는데, 앱에서 주문하면 내 음료의 순서와 다른 사람이 주문한 음료를 나란히 볼 수 있다. 날씨가 추워지면 추워질수록 커피를 주문할 때마다 두근거린다. '설마 오늘도 사람들은 아아를 마시고 있을까...?' 영하 11도에도 아아의 민족은 아랑곳하지 않고, 유일한 핫 주문자는 속이 뜨거운 사람들이 웃겨 서둘러 캡쳐를 한다.

왜들 그리 아아를 들이키시는 거에요...

25년 2월 5일 수요일

약수 보헤이 커피. 갈 수 있는 타이밍 잡기가 어려워서 기회가 있을 때 간다. 인생사에 대해 생각했다.

라떼를 15분컷 하고 드립을 주문했더니 사장님이 놀라셨다.

25년 2월 8일 토요일

코딩 숙제를 제때 하면 좋을텐데 늘 수업 직전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한다. 이 날은 경복궁 오커쇼어에서 단호박 빵을 씹으며 숙제를 했다. 시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25년 2월 8일 토요일

수업이 끝나고 을지로에서 엄마를 만났다. 피자를 먹고 싶다고 해서 경일옥 핏제리아를 먹고, 바로 옆에 있는 작은물에 갔다. 을지로 가게들의 열악함에 엄마가 치를 떨었다. 특히 작은물은 화장실이 푸세식이라서 나도 놀랐다. 다시는 가지 않으리...

25년 2월 9일 일요일

좋아하는 프로스콘스에 갔는데, 새로운 직원분이 계셨고 뭉개진 라떼를 받아서 웃겼다. 우유를 너무 뜨겁게 데워서 거품이 끓어버린 듯 했다.

25년 2월 15일 토요일

이 날 코딩 수업에서는 뽀시래기같은 강아지 밍구가 등장했고 모두가 심장폭격을 당해 말을 잃었다.

25년 2월 16일 일요일

발렌타인데이에 태어난 선호님의 생일 식사를 했다. 분홍색 노란색 생화가 꽂혀있는 레스토랑에서 선호님이 잔망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주말의 강남은 생각보다 북적거렸고, 세 군데의 카페를 실패한 뒤에 아티제 삼성타운점에 겨우 앉았다. 추위에 1시간을 넘게 헤맸더니 방금 코스를 먹고 왔는데도 빵 2개를 절반씩 나눠먹었다.

25년 2월 17일 월요일

하룻밤 자고 오는 일정으로 일본 출장을 갔고 웬일로 일하는 사진이 남았다. 눈이 죽어있는 사진을 올렸더니 친구가 '웃고 있지만 지쳐있고 하지만 뭘 물어봐도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전형적인 차장님 표정' 이라고 해서 웃겼다. 사무실에서 괜찮으시냐는 말 하루에 3번씩 들어서 이제 그냥 지침이 끼니와 같다. 배터리 로우 인간은 먼저 말을 하지는 않지만, 물어보시면 뭐든 답해드린답니다,,

늦게 도착한 도쿄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하고 걷다가 사진을 남겼다. 일본에서 커피를 마실 때마다 레귤러 사이즈의 작음에 놀라고.

25년 2월 22일 토요일

코딩 숙제를 제때제때 하면 좋을 텐데.. (2) 이 날도 경복궁 근처 빵집을 검색하다가 '파네토' 라는 곳을 찾았고 후기가 괜찮길래 일부러 가봤다. 숙제를 해야 하니까 적당한 곳에서 빠르게 밥을 먹으면 될텐데 굳이굳이 맛있는 빵을 찾아 먹겠다는 나. 노트북 꺼낼 자리도 충분하지 않은 좁은 테이블에 앉아 시오에그마요를 우적우적 먹었다. 커피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라떼 아트가 예쁘게 나와서 놀랐고, 모양만큼 맛도 있어서 더블 놀람이었다. 정작 숙제는 거의 못하고 밥만 먹고 나왔다. 다음에 또 혼밥 타이밍이 오면 가게 될듯.

25년 2월 23일 일요일

선호님과 종로 전주식당에서 생선구이를 먹고 약수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래에서는 주로 테이크아웃을 하는데, 오랜만에 자리에 앉았다. 카운터 옆 구석자리가 비어있어 쪼그리고 앉아 얘기를 나눴다. 선호님이 자꾸 어려운 질문을 해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미궁에 빠졌다. 유독 추위에 떨었던 저녁.

커피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니 매달 커피를 마실 때마다 부지런히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예쁘지 않은 자리도 꼭 사진을 찍었다. 일상이 붙잡을 때 잡히고 놓으면 사라지는 걸 실감했다.

얼마 전, 인스타에서 코난 오브라이언이 cafe hopping을 좋아한다고 하는 릴스를 봤다. 동료들이 이상한 취미라며 비웃으니까, "I don't know. I love it. I love cafe hopping. It discribes my life!"

카페와 카페를 오가며 커피를 털어 넣는 일이야말로 내 인생을 설명하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게 좋다. 2월은 사진에 남기지 못한 순간까지 12번의 카페에 앉았다. 카페는 주로 사람과 앉아있고, 타인이 없더라도 내가 나와 있다. 3월엔 누구와 어떤 커피를 마시게 될까. 오지 않은 순간을 미리 궁금해한다.




𖡼여기까지 내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𖡼
Alright, but this is a lot.

갈 길을 찾는 애플파이

2월은 태어나 먹은 애플파이 중 가장 맛있는 애플파이를 먹은 달이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애플파이를 먹은 이야기만이 길게 이어지므로, 애플파이에 큰 관심 없으시다면 뒤로 가기를 추천드립니다.

때는 2월 17일, 저는 1박 2일 출장으로 일본에 도착했습니다. 아침 일찍 도쿄를 출발해서 가나가와현의 후지사와에 갑니다. 이런 일정이 있는 날은 출발 전부터 몇 번이나 목적지를 검색해 봅니다. 신바시 역에서 오다와라행 도카이도 본선을 타고, 시나가와를 거쳐 요코하마를 찍고 오후나 역에서 택시를 타는 여정. 걸리는 시간을 역순하여 기상 시간도 철저히 따져봅니다. 저는 아침잠이 많으니까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야 하는 아침이면 늘 긴장한 채 잠에 드니까요.

18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침대에서 일어난 시간은 어제의 계획보다 10분 늦은 7시 40분. 열차를 타기 전 커피를 사고 싶었는데 점점 커피 살 시간이 줄어듭니다. 그래도 아직 괜찮아요, 8시 52분 기차를 타면 되니까요. 겨우 준비를 마치고 서둘러 체크아웃을 하고 작은 캐리어를 끌며 플랫폼을 찾아갑니다. 지도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데, 구글맵에 4분 연착이라는 알림이 떠있습니다. 허겁지겁 계단을 올라가니 연착이라던 52분 열차가 제시간에 도착해 있었어요. 부랴부랴 타고 자리에 앉습니다. 지금부터 45분을 쭉 달려가면 됩니다. 다음 역은 시나가와입니다.

잠시 후 문이 닫히고 열차가 출발합니다. 바쁜 출근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열차 안이 무척 한가합니다. 창문 사이로 들이치는 아침 햇살은 따스하고요. 녹색의 벨벳 천이 깔린 의자 위에 직장인들이 드문드문 앉아있습니다. 핸드폰을 보거나 문고본을 읽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흐릅니다. 그런데 이 평화로운 풍경에서 전해지는 스산한 기분은 뭘까요. 평생을 길치로 살아오면서 인생에 많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길치 주제에 출장이 잦은 일을 하느라 매번 새로운 거래처의 사무실을 찾아가야 했는데요, 남편인 선호님은 저를 오랜 시간 교육시켜 왔습니다. 출장 전날 구글맵을 켜고 거리뷰를 보면서 미리 예습을 하고요, 저의 출장 일정을 엑셀로 정리하여 매 동선마다 가는 법을 상세히 적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치는 이런 일기를 적습니다. 그 시간을 거쳐 이제 저도 성장했다 이 말이에요. 이제 느낌 알거든요, 이 스산한 느낌. 그건 바로 제가 좆됐다는 신호입니다. 길치가 또 좆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열차 안이 수상하다고 느낀 순간 다음 역이 '도쿄'라는 방송이 나옵니다. 다음 역은 분명 시나가와여야 하는데, 저는 완행열차를 탄 걸까요? 조금만 더 기다리면 시나가와가 나올까요? 설마 진짜 혹시 진짜 방향이 틀린 걸까요? 만약 잘못 탄 거라면 도쿄에서 제일 복잡한 역인 도쿄역에서 제가 제대로 된 열차를 잡을 수 있을까요? 저는 이미 지난 출장에서 수차례 도쿄역 던전을 헤매 죽다 살아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도쿄역에서 여정을 시작하거나 경유하는 동선을 만들지 않습니다. 짧은 순간에 수만 가지 생각이 밀려오고 열차가 속도를 늦추기 시작합니다. 구글맵을 아무리 뒤져봤자 답은 보이지 않고 심장이 쿵쾅거립니다. 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마스크를 쓴 옆자리 여성분에게 말을 걸기로 합니다.

"저..., 죄송한데요..."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 평화로운 지하철에서 말검을 당하고 동공이 흔들리는 여성분)

(그 사실을 너무 잘 알지만 좆될 수 없는 나) "제, 제가 요코하마에 가야 하는데요, 신바시에서 탔는데요, 이 열차가 그쪽으로 가나요..?"

(눈을 동그랗게 뜬 여성분이 상황을 파악하고 서서히 표정이 풀어집니다) "아아, 요코하마...? 갸쿠데스!"

(머리가 쭈뼛) "갸쿠?! 감사합니다!!"

逆갸쿠. 길치에게 그것은 오카상 오토상 다음으로 외워야 하는 필수 일본어. 갸쿠의 한자를 찾아보면 '거스릴 역'이라고 읽습니다. 역시나 오늘도 거슬러 버렸습니다. 열차 문이 열리자마자 튀어나갑니다. 플랫폼을 질주합니다. 역무원 님, 어딘가 역무원 님이 있을 겁니다. 저기 제복을 입은 분이 보이고, 요코하마 요코하마를 외치며 달려갑니다. 요코하마무새가 된 저를 보고 역무원 분도 심각성을 아셨는지 9번, 9번 플랫폼으로 가라는 말을 반복하십니다. 짧은 소통으로 목숨을 부지할 정보를 얻었습니다. 계단을 다다다 내려가고 9번을 찾아 다다다 올라가서 열차에 탑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일단 문이 닫혔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무사히 요코하마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길치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똑바로 탔는데도 똑바르지 않을 때입니다. 하라는 대로 했는데 나와야 할 것이 나오지 않을 때. 9번에서 타라고 하셔서 9번에서 탔지만,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다음 역에 대한 안내 방송이 나올 때까지 초조하게 전광판을 응시합니다. 열차가 다시 신바시를 향합니다. 제가 출발했던 역입니다. 그러면 방향이 맞는 것 같아요. 신바시를 지나니 다음 역은 시나가와. 길치가 오늘치 초조함을 치르고 겨우 좆됨을 면했습니다.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도 지도에서 눈을 뗄 수 없기 때문에 45분 내내 구글맵을 쳐다봅니다. 멈추는 정거장마다 구글맵과 일치하는지 확인하다 보니 어느새 오후나 역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역에서 택시를 타면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긴장이 풀리니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습니다. 개찰구를 나와 빠르게 카페를 스캔합니다. 스타벅스가 있네요. 안을 슥 훑어보니 대기줄이 꽤나 깁니다.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허름한 빵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커피가 맛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뭐라도 내줄 것 같아요. 여기서 커피를 사기로 합니다. 빵집은 갓 구운 빵이 가득했습니다. 허기도 지니 빵이라도 먹을까 하는데, 매장 한복판에 먹음직스러운 애플파이가 가득 쌓여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맨 처음에 얘기한 그 애플파이입니다.

갓 구운 애플파이의 무더미에는 손으로 오려 코팅한 안내문구가 꽂혀 있었습니다. 인기 넘버원. NHK 아사이치에서 소개되었습니다. 아사이치는 NHK에서 하는 '생방송 아침이 좋다' 같은 프로그램입니다. 아사이치를 사전에서 찾으면 (일 등을) 그날 아침 가장 먼저 하는 것 이라는 뜻이 나옵니다. 애플파이가 아사이치에 소개되었을 뿐인데, 애플파이=아사이치의 공식이 성립되면서 어쩐지 아침으로 애플파이를 먹어야 할 거 같은 기분이 듭니다. 빵순이지만 보통 아침에 애플파이를 먹지는 않는데요, 카페에서는 토스트를 아침 세트로 팔고 있었는데요, 그걸 먹을 시간은 없고 당장 커피를 사서 택시를 타야 하는데 어느새 저는 아사이치부터 애플파이를 먹어야 하는 몸이 되어있습니다. 홀린 듯 카페오레와 애플파이를 주문합니다. 사면서도 이게 맞나 싶습니다. 커피를 손에 받아 들고 애플파이를 넣은 봉투는 손목에 걸고 캐리어를 끌면서 택시 승강장을 찾아갑니다. 서쪽 출구에서 나와 택시 마크를 따라 한참 걸었는데 여기가 아니래요. 여기는 버스 정류장이래요. 다시 온 길을 되돌아 역에서 이어지는 육교 위를 헤맵니다. 몇 번의 갈래길 끝에 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역 밑으로 내려왔습니다. 작고 수상한 택시 승강장이 나타났습니다.

시골 역의 작은 택시 승강장에는 연세가 지긋한 노인이 한 명, 깡마른 비즈니스 맨이 한 명 서있었습니다. 적당히 간격을 두고 그 뒤에 제가 섭니다. 바람이 매서워요. 얇은 정장을 입은 비즈니스 맨이 추위에 어깨를 움츠리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얼마나 기다린 걸까요. 택시가 오긴 하는 걸까요. 시간은 점점 지나고, 길치의 초조함이 다시 스멀스멀 살아납니다. 어딘가 다른 곳으로 택시를 찾아 이동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대로변으로 나가볼까 싶어졌을 때, 드디어 택시 한 대가 들어오고 노인분이 천천히 올라타셨습니다. 이제 기다리는 사람은 비즈니스 맨과 저. 아무래도 이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러놓는 그 택시 정류장에서 캐리어와 A0 사이즈 포스터, 거래처용 오미야게를 바닥에 내려놓고, 애플파이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카페오레를 한 모금 마시고, 별생각 없이 애플파이를 베어 물었는데, 두둥 이게 무슨 일이죠. 바삭하고 두툼한 파이지가 촉촉한 사과 속을 감싸고 있고, 입 안 가득 버터향이 퍼집니다. 방금 먹은 맛이 헷갈려서 다시 크게 한 입을 베어 뭅니다. 빵집에서 정신이 없던 와중에도 구워진 생김새가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요, 속이 묵직하게 들어있는 파이가 어찌나 맛있는지 횡재를 한 기분이 됩니다.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던 카페오레는 파이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고요. 한 입, 또 한 입. 파이 가루가 코트 여기저기 후드득 떨어지고, 바람은 휘몰아쳐 추워 죽겠는데, 택시는 오는 건지 마는 건지 비즈니스 맨의 움츠러든 어깨는 펴질 줄을 모르고, 저는 파이, 그 애플파이를 먹습니다.

다시 한참이 지나고 택시가 왔습니다. 추위에 떠는 비즈니스맨이 서둘러 택시에 올라탑니다. 이제 다음 차례는 저. 어느새 제 뒤에는 다른 동네 주민이 줄을 섰습니다. 저는 여전히 우적우적 파이를 먹고 있습니다. 한 입의 맛을 최대치로 느끼기 위해 입을 쩍쩍 벌리고 파이를 베어뭅니다. 제가 탈 택시는 언제쯤 올까요. 파이를 다 먹을 시간이 주어지니 오히려 좋습니다. 양손에 짐이 한가득이라 파이 사진을 찍어두지 않은 게 아쉽고, 그런데 정말 끝내주게 맛있어서 웃기고, 입과 코트에 가루가 다 묻건 말건 뒤에 사람이 있건 말건 열과 성을 다해 애플파이와 카페오레를 먹어치웁니다. 이제 마지막 한 입이 남았습니다. 아쉬워 눈도장을 찍습니다. 입 안 가득 밀어 넣고, 제자리 뛰기를 하며 입과 코트에 묻은 가루를 털어냅니다. 때마침 택시가 왔습니다. 완벽한 하루가 시작됐습니다.



구글맵에서 가게를 찾아왔습니다.


카나가와현 오후나 역에 갈 일은 도통 없으실테니 눈으로 저의 파이를 감상하셔요.

2월은 한쪽에서 애플파이를 우적우적 먹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 잔잔하게 중년의 위기를 겪어왔습니다. '중년의 위기'라는 말이 웃기지만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 중년의 위기라는 표현 말고는 대체할 말이 없습니다. 중년은 위기를 겪기 때문에 중년이구나, 위기에 봉착한 중년이 실감합니다. 처음에는 이게 뭔지 알지 못했는데, 선호님이 얼마 전에 알려주셨어요. "그래서 내가 깨달은 게 뭐냐면, 너랑 나는 그냥 지금..., 중년의 위기야."

관용구의 힘은 대단하지요. 중년의 위기라는 말을 듣고 나니 여러모로 납득이 되었습니다. 중년에 이런 위기를 겪을 거라고 어쩜 그렇게 아무도 말해주지 않을 수 있는 건가요. 중년의 위기를 유머로 취급하기엔 중년이 겪는 위기가 상당히 힘에 부칩니다. 하지만 중년까지 살아왔기에 생긴 희망이라면, 위기 속에서도 중년은 출근을 하고 시시덕거리고 요가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코딩을 배우고 영화관에도 갑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대체로 잘 웃고요, 종종 위축됩니다. 말을 하느라 지쳤다가 말을 하느라 회포가 풀립니다. 그 사이사이 매일 커피를 마시고 맛있는 애플파이를 만나면 전율합니다. 눈앞의 애플파이가 줄어드는 것에 아쉬워합니다. 이제는 딱히 아쉬울 게 없을 것 같다가도 불현듯 애플파이가 아쉬워지는 게 중년의 위기일 거라고 배워갑니다.

희망과 절망 속에 작년에 이어 올해도 비슷한 위기가 이어지는데요, 내년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위기의 구간을 어떻게 지나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아, 한 번에 한 달치의 위기만을 타개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달에는 커피와 애플파이에 대한 일기를 씁니다. 바삭한 파이지에 대해 긴 일기를 쓰는 동안 위기가 잠시 잊혀졌습니다. 다음 달에는 다음 달만큼의 위기만 다뤄보겠습니다.




𖡼여기까지 내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𖡼
Alright, but this is a lot.